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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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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베르 카뮈는 1913년 알제리에서 태어난 프랑스계 작가이자 철학가로, 부조리, 반항, 연대와 같은 주제를 탐구하며 20세기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이방인》, 《페스트》와 같은 소설과 《시지프 신화》, 《반항하는 인간》 등의 에세이를 통해 인간의 조건과 자유에 대한 고찰을 제시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으며, 알제리 독립 전쟁에 대한 입장을 둘러싸고 논쟁을 겪기도 했다. 195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1960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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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57년, 책상에 앉아 왼쪽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는 알베르 카뮈의 초상화
1957년 초상화
출생일1913년 11월 7일
출생지프랑스령 알제리 몽도비
사망일1960년 1월 4일
사망지프랑스 빌블르뱅
국적프랑스
알베르 카뮈 서명
알베르 카뮈 서명
학력
모교알제 대학교
직업
직업소설가, 극작가, 사상가, 수필가, 기자
활동
활동 기간1935년 - 1960년
주제윤리학, 인간 본성, 정의, 정치, 자살 철학
사상
사조대륙 철학
부조리주의
실존주의
프랑스 니체주의
생디칼리슴 아나키즘
주요 관심사윤리, 인간 본성, 정의, 정치, 자살 철학
주요 사상부조리주의
작품
주요 작품'이방인' / '아웃사이더'
'시지프 신화'
'반항하는 인간'
'페스트'
데뷔 작품'뒷면과 앞면'(1935년, 에세이)
수상
수상노벨 문학상 (1957년)
노벨상 수상 이유"이 시대에 인간의 도덕적 문제를 분명한 시각으로 진지하게 조명한 그의 중요한 문학적 창작 활동" 1957년 노벨 문학상 요약
가족
배우자시몬 이예 (1934년 결혼, 1936년 이혼)
프랑신 포르 (1940년 결혼)
친척세인 카뮈 (대 조카)
영향
영향 받은 사람시몬 베유 등

2. 생애

2. 1. 어린 시절과 교육

1913년 알제리의 몽도비(Mondovi, 현재의 드레앙)에서 프랑스계 알제리 이민자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뤼시앵 카뮈(Lucien Camus프랑스어)는 제1차 세계대전의 마른 전투에서 1914년 사망했다. 그의 어머니 카트린 엘렌 생테스(Catherine Hélène Sintès프랑스어)는 스페인인으로 문맹이며 청각장애를 가졌다. 카뮈는 어린 시절 알제에서 가난하게 지냈으며, 1923년 프랑스의 중등학교인 리세[38]에 들어갔다.

알제 대학교를 보여주는 엽서
20세기 알제 알제 대학교 엽서


어린시절 카뮈에게 큰 영향을 준 스승으로는 초등학교 교사인 루이 제르맹이 있었다. 제르맹은 카뮈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의 가족을 설득하여, 1924년 카뮈가 장학금을 받고 알제의 고등학교 리세 비죠에 진학 할 수 있도록 도왔다. 카뮈는 그에게 받은 은혜를 평생 잊지 않고 노벨상 수상 기념 강연 출판 시 "루이 제르맹 선생님께"라는 헌사를 덧붙였다.[4] 리세 시절 카뮈는 축구에 열중했고, 때로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비교적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알제 대학교에 입학했으나 1930년 폐결핵으로 중퇴하였다. 재학 중에도 각종 임시직을 전전하였으며 대학 중퇴 이후에도 가정교사, 자동차 수리공, 기상청 인턴과 같은 잡다한 일을 하였다. 이 시기 평생의 스승인 장 그르니에를 만난다. 그는 1935년 플로티누스에 관한 논문으로 철학 학사 학위 과정을 끝냈다.[7] 그 동안에 아마추어 극단을 주재했다. 가난했지만 멋부릴줄 아는 멋쟁이였으며 축구팀 골키퍼를 할 정도로 운동을 좋아했다. 훗날 외모면에서 종종 험프리 보가트에 비교되곤 했다.

2. 2. 청년기와 사회 활동

1934년 시몬 이에(Simone Hie)와 결혼했다. 당시 카뮈는 시몬이 모르핀 중독을 극복하는 것을 돕기 위해 결혼했지만, 이후 주치의와 불륜관계라는 것을 알자 1940년 이혼한다.

1935년 카뮈는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님에도 알제리인과 유럽인들 간의 차별을 줄일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한다. 1936년 좀 더 독립적인 성향의 알제리 공산당이 수립되자 스승인 그르니에의 권고로 카뮈는 알제리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알제리 공산당에서 카뮈는 1935년부터 1939년까지 운영된 '노동자의 극장'(Théâtre du Travail)을 설립했다. 카뮈는 보다 온건한 독립 성향 정당인 알제리 인민당과도 가까운 사이를 유지했는데, 전간기 두 정당 간의 갈등으로 인해 공산당과 인민당이 갈라설 때 카뮈는 공산당과 입장을 달리해 공산당에서 제명되었다. 공산당과의 결별 이후에도 극단은 에키프 극단(Théâtre de l'Equipe프랑스어)으로 이름을 바꾸어 지속되었다. 당시 극단 활동을 하며 썼던 대본은 이후 소설의 밑바탕이 되기도 했다.

1938년부터는 좌익 성향의 신문 알제 뤼페블리껭(Alger-Republicain)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문화기사와 르포를 주로 썼다. 사르트르의 책 '구토'에 대한 서평도 알제 뤼페블리껭에 쓴 것이다. 당국이 알제 뤼페블리껭의 발행을 금지하자 파리로 간 카뮈는 일간지 파리스와 ()에서 편집자로 근무했으며, 이때 소설《이방인》과 수필《시지프 신화》, 희곡 《칼리굴라》를 발표한다.

1950년 카뮈는 인권 운동에 자신의 전력을 다 바쳤다. 1952년 UN이 프랑코 치하에 있는 스페인을 회원국으로 받아들이자 UNESCO의 임원직을 사임했다. 1953년 그는 동베를린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을 분쇄한 소비에트 연방의 방식을 비난했다. 1956년 그는 폴란드에서 일어난 같은 방식의 파업분쇄와 소비에트 연방이 10월 헝가리 반란을 진압한데 대하여 저항의 소리를 냈다.

카뮈는 그의 평화주의와 세계 어디에서든 일어나고 있는 사형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여 주장했다. 사형 반대 운동에 대한 그의 주목할 만한 기여로 사형반대협회의 설립자인 아서 쾨슬러(Arthur Koestler)와 협동하여 쓴 에세이가 있다

2. 3. 제2차 세계 대전과 레지스탕스 활동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카뮈는 참전을 지원했지만, 폐결핵으로 인해 프랑스 군 입대를 거절당했다. 이후 파리스와에서 해고된 카뮈는 리옹으로 이사했으며, 1940년 그곳에서 수학자이자 피아니스트인 프랑신 포르(Francine Faure)와 결혼했다. 카뮈와 포르는 오랑으로 돌아갔고, 카뮈는 그곳에서 학교 선생으로 근무했다. 이후 결핵 치료를 위해 프랑스 알프스에서 머물렀으며, 이 때 《페스트》와 《오해》를 집필했다. 카뮈의 작품이 점차 알려지면서 파리로 돌아온 그는 장폴 사르트르와 만나 친구가 되었다.

전쟁 기간 동안 카뮈는 지하에서 같은 이름의 신문을 출판하던 레지스탕스 조직 콩바(Combat)에 가담하여 나치에 저항했다. 카뮈는 '보샤르(Beauchard)'라는 필명을 사용했으며, 1943년 연합군이 파리를 해방한 후에는 신문의 편집자가 되어 전투 이후를 보도했다. 1945년 8월 8일,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 사용에 대한 반대 논설을 싣기도 했다. 카뮈는 콩바가 상업적인 신문이 되자 1947년 사임했다.

2. 4. 문학적 성취와 노벨 문학상 수상

알베르 카뮈는 레지스탕스 활동으로 작가로서 명성을 얻었으며, 미국과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 대학에서 강연을 했다. 1951년에는 《반항하는 인간》을 출판하여 전체주의적 공산주의를 비판하고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아나르코생디칼리슴을 옹호했다. 이 책은 프랑스 내 많은 좌익 지식인들의 반발을 샀고, 장 폴 사르트르와의 논쟁 끝에 결별하게 되었다.

카뮈는 부조리에 대한 사상을 《시지프 신화》에서 설명하고, 《이방인》, 《페스트》 등 여러 작품에서 묘사했다. 그는 실존주의자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에세이 '에니그마' 등에서 이러한 분류를 거부했다.

작품으로는 《이방인》, 《시지프 신화》로 사상가로서 인정받았고, 해방 후에는 《오해》, 《칼리굴라》로 극작가로서 성공을 거두었다. 《계엄령》, 《정의의 사람들》 등 순도 높은 고전적 문체의 실존주의 연극으로 호평받았다. 이후에는 《정령》, 《십자가에의 예배》, 《악령》 등 각색 및 번안에 힘을 쏟았다.

195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1967년 몬트리올 세계 박람회에서 에드몽 자베스, 장 폴 사르트르,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와 함께 네 명의 프랑스 작가 중 하나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Camus crowning Stockholm's 루시아 on 13 December 1957, three days after accepting the <a href=노벨 문학상">


카뮈는 유럽 통합을 강력히 지지했으며, 1944년 프랑스 유럽 연방 위원회(CFFE)를 설립하여 유럽이 연방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7~48년에는 혁명적 노조주의 운동 단체인 Groupes de Liaison Internationale프랑스어(GLI)를 설립했다. 그는 초현실주의와 실존주의의 긍정적인 측면을 표현하고 앙드레 브르통의 허무주의를 거부하고자 했다. 또한 헝가리 침공과 프란시스코 프랑코 정권의 전체주의적 경향에 대해 비판했다.

카뮈는 특히 스페인 출신 여배우 마리아 카사레스와 불륜 관계를 맺었고, 광범위한 서신을 주고받았다. 이로 인해 아내 포르는 정신 붕괴를 겪었고, 카뮈는 죄책감으로 공적인 생활에서 물러나 우울한 시기를 보냈다.

1957년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은 그에게 충격이었는데, 앙드레 말로가 수상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는 44세로 러디어드 키플링에 이어 두 번째로 어린 수상자였다. 이후 자서전 《첫 번째 인간》을 쓰기 시작했고, 노벨상 상금으로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악령》을 각색하여 연출, 앙투안 극장에서 개막하여 비평적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갈리마르에서 설립한 "에스푸아르"('희망') 시리즈에서 철학자 시몬 베이유의 작품을 출판했다. 시몬 베이유는 카뮈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는 베이유의 글을 허무주의에 대한 "해독제"로 보았다. 카뮈는 그녀를 "우리 시대의 유일한 위대한 정신"이라고 묘사했다.

|thumb|left|시몬 베이유]]

카뮈는 자신의 작품을 세 가지 주기로 나누었다. 첫 번째는 부조리의 주기로 《이방인》, 《시지프 신화》, 《칼리굴라》가 포함된다. 두 번째는 반항의 주기로 《페스트》, 《반항하는 인간》, 《정의로운 자객들》이 포함된다. 세 번째는 사랑의 주기로 《네메시스》가 포함된다. 각 주기는 이교 신화를 사용하고 성서적 모티브를 포함하여 주제를 검토했다.

카뮈의 작품: 장르와 주기에 따른 분류,
연도이교 신화성서적 모티브소설희곡
1937–42시지프스소외, 망명『이방인』(L'Étranger)『칼리굴라』,
오해』(Le Malentendu)
1943–52프로메테우스반항페스트』(La Peste)『포위 상태』(L'État de siège)
『정의로운 자들』(Les Justes)
1952–58죄책감, 타락; 망명과 왕국;
세례자 요한, 그리스도
『추락』(La Chute)『악령』(도스토예프스키) 각색;
포크너의 『수녀를 위한 레퀴엠』
1958–네메시스왕국『첫 번째 인간』(Le Premier Homme)


2. 5. 알제리 문제와 갈등

1954년 알제리 독립전쟁이 발발하자 알제리에 어머니가 살고 있던 카뮈는 도덕적 딜레마에 빠졌다. 그러나 그는 알제리계 ''피에드누아''의 정체성을 택하여 프랑스 정부를 옹호하였다. 그는 북아프리카 식민지의 반란이 이집트 주도의 신 아랍 제국주의와 소비에트 연방의 “유럽 둘러싸기”, “고립된 미국”, “반 서방주의”의 일부분이라고 주장하였다. 카뮈는 알제리에 더욱 큰 자치권을 인정하거나 연방정부를 구성하면 알제리계 프랑스인과 아랍인들 간의 공존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으며, 알제리의 완전 독립에는 부정적이었다.

1905년부터 1955년까지의 알제리 프랑스령의 행정구역
1905년부터 1955년까지의 프랑스령 알제리 행정구역


전쟁 기간 동안 그는 양측 모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정전협정을 위하여 헌신했다. 이러한 활동 뒤에 그는 사형에 직면한 체포된 알제리인들을 구하기 위하여 비밀리에 활동하였다. 그는 1957년 스톡홀름 대학교 학생들을 상대로 강의하며 알제리 문제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였다. 그리고 그는 아직도 알제리에 살고 있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염려된다고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성명은 프랑스의 좌익 지성으로부터 더욱 극심한 배척을 야기하였다.

카뮈는 "새로운 지중해 문화"의 열렬한 옹호자였다. 이는 다른 ''피에드누아''(알제리 태생 프랑스인 또는 유럽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친파시스트적이고 반유대주의적인 이념인 "라틴성"과는 대조적으로 알제리 국민의 다민족성을 포용하려는 그의 비전이었다. 카뮈에게 이 비전은 지중해 주변의 보통 사람들 사이에 살아남은 헬레니즘적 인본주의를 담고 있었다. 그의 1938년 연설 "새로운 지중해 문화"는 당시 카뮈의 견해를 가장 체계적으로 보여주는 글이다. 카뮈는 또한 알제리인들에게 완전한 프랑스 시민권을 부여하려는 블룸-비올레 제안을 지지하며, 급진적인 평등주의적 근거를 바탕으로 이 동화주의적 제안을 옹호하는 주장을 담은 선언문에 서명했다. 1939년 카뮈는 Alger républicain프랑스어에 카빌리 고지대 주민들의 끔찍한 생활 환경에 대한 일련의 신랄한 기사를 썼다. 그는 경제적, 교육적, 정치적 개혁을 긴급한 문제로 옹호했다.

1945년 아랍인들이 프랑스의 탄압에 맞서 봉기한 후 세티프와 겔마 학살이 발생하자, 카뮈는 식민지(알제리)를 방문한 소수의 본토 언론인 중 한 명이었다. 그는 현황을 보도하고 프랑스의 개혁과 알제리 국민의 요구에 대한 양보를 옹호하는 일련의 기사를 썼다.

2. 6. 죽음

카뮈는 1960년 1월 4일, 생스 근처의 작은 마을 빌르블뱅에서 미셸 갈리마르가 몰던 파셀 베가 자동차가 플라타너스 나무와 충돌하는 사고로 46세의 나이에 사망했다.[13] 조수석에 타고 있던 카뮈는 즉사했고, 갈리마르는 5일 후 사망했다.[13] 카뮈의 코트 주머니에서는 사용되지 않은 파리행 전철 티켓이 발견되었는데, 원래 카뮈는 전철로 이동할 예정이었으나 사고 당일 아침 친구인 미셸 갈리마르의 권유로 자동차를 타게 되었다. 그는 평소 자신이 사랑하여 죽기 직전까지 거주한 프랑스 남부의 시골 마을인 루르마랭의 묘지에 매장되었다.

1960년 1월 4일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 빌르블뱅에 세워진 카뮈 기념비


카뮈는 소련 체제와 알제리 독립에 반대한 것으로 인해 KGB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한다.[31] 이탈리아 대학교수 조반니 카텔리(Giovanni Catelli)는 2011년 『코리에레 델라 세라』에서 카뮈가 1957년 3월 『Franc-Tireurs』지에 기고한 글에서 1956년 소련군의 헝가리 혁명 진압을 비난하며 소련 외무장관 드미트리 셰필로프를 비난했기 때문에 셰필로프가 KGB에 암살 지시를 내렸다는 설을 발표했다.[31]

카뮈 사후, 두 개의 작품이 유작으로 출판되었다. 1970년에 출판된 《행복한 죽음》은 《이방인》과 흡사한 인물인 Meursault를 그린 작품이다. 1994년에는 카뮈가 죽기 직전까지 집필한 미완성 자전적 소설 《첫 인간》이 출판되었다.

3. 사상

많은 작가들이 개인의 부조리에 대해 정의하고 해석하여 왔으며, 부조리의 중요성에 관한 그들 나름의 생각에 대하여 글을 써왔다.[14] 장 폴 사르트르는 일반적인 종교들이 우리가 의 존재에 도달하는 것을 막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부조리를 지적하는 키르케고르를 언급하며 부조리를 개인적인 경험의 범주로 인지하였다. 카뮈는 부조리주의의 창시자가 아니며 부조리주의 철학자로 계속 여겨지는 것을 후회했다. 카뮈는 《시지푸스의 신화》를 출판한 이후 점차 부조리주의에서 관심이 멀어졌다. 연구자들은 카뮈의 사상을 다른 철학자들의 사상과 구별하기 위하여 부조리의 패러독스를 말한다.

카뮈의 부조리에 관한 생각은 1937년 발간된 그의 첫 에세이집 《안과 겉》에 나타나 있다. 부조리 테마는 1938년 발간된 그의 두 번째 에세이집 《결혼》에 좀 더 세련되게 나타나 있다. 이러한 에세이들에서 카뮈는 부조리에 관한 철학적인 설명을 하거나 정의를 내리고 있지 않고, 대신에 부조리의 경험을 투사하고 있다. 1942년 카뮈는 인간 존재의 삶에 존재하는 부조리에 관한 이야기인 《이방인》을 출판하였고 이어 동시에 부조리에 관한 문학적 에세이인 《시지프 신화(Le Mythe de Sisyphe)》를 출판하였다. 그는 또 부조리 논리를 추구하는 로마 황제 칼리귤라에 관한 연극을 작성했다. 그러나 이 연극은 1945년까지 상영되지 못했다.

1943년 7월에서 1944년 7월까지 익명의 독일인 친구에게 보낸 4개의 편지에서 카뮈는 부조리에 대한 생각의 변화를 드러낸다. 첫 번째 것은 1943년 the Revue Libre에서, 두 번째 것은 1944년 Cahiers de Libération에서, 세 번째 것은 1945년 Libertés신문에서, 출판되었다. 4개의 모든 편지들은 《독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이름으로 1945년에 작품집 《레지스탕스, 반역, 그리고 죽음》에 수록되어 출판되었다.

카뮈는 도덕가였으며, 도덕이 정치를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도덕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역사적 물질 관계가 도덕을 정의한다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거부했다.

카뮈는 또한 특히 소련의 경우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강력하게 비판했는데, 그는 소련을 토탈리타리즘 국가로 여겼다. 카뮈는 소련 모델에 동정적인 사람들과 그들의 "완전한 예속을 자유라고 부르는 결정"을 비난했다. 자유주의적 사회주의 지지자인 그는 소련이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고 미국이 자유주의 국가가 아니라고 말했다. 소련에 대한 그의 비판은 그를 좌파 정치인들, 특히 그의 오랜 친구인 장-폴 사르트르와 충돌하게 만들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의 프랑스 점령에 대한 프랑스 레지스탕스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카뮈는 레지스탕스 잡지 ''콩바''를 위해 글을 쓰고 편집했다. 독일 점령군과의 프랑스 협력에 대해 그는 이렇게 썼다. "이제 유일한 도덕적 가치는 용기이며, 이는 여기서 백성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꼭두각시와 수다쟁이들을 판단하는 데 유용합니다." 프랑스 해방 후 카뮈는 이렇게 말했다. "이 나라에는 탈레랑이 아니라 생쥐스트가 필요합니다." 전후 재판의 현실은 곧 그의 생각을 바꾸게 했다. 카뮈는 공개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바꾸고 사형제도의 평생 반대자가 되었다.

카뮈는 1950년대 소련 모델이 도덕적으로 파탄났다고 믿게 되면서 무정부주의적 동정심을 갖게 되었고, 그것은 더욱 강해졌다. 카뮈는 어떤 종류의 착취, 권위, 사유재산, 국가, 중앙집권화에도 단호히 반대했다. 그러나 그는 혁명에 반대했고, 반란하는 자와 혁명가를 구분하며, "절대적 진리"에 대한 믿음(대부분 역사나 이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이 혁명가를 고무시키고 비극적인 결과로 이어진다고 믿었다.[14] 그는 반란이 세상의 초월적인 의미 부재에 대한 우리의 분노로 인해 자극받는 반면, 정치적 반란은 개인의 존엄성과 자율성에 대한 공격에 대한 우리의 대응이라고 믿었다.[14] 카뮈는 정치적 폭력에 반대했고, 매우 드물고 좁게 정의된 경우에만 그것을 용인했으며, 역사의 제단에 무고한 생명을 희생시킨다고 비난한 혁명적 테러에도 반대했다.[15]

철학 교수인 데이비드 셔먼은 카뮈를 무정부 싱디칼리스트로 여긴다. 그레이엄 니콜슨은 카뮈를 실존주의적 무정부주의자로 여긴다.

무정부주의자 앙드레 프뤼돔은 1948년 Cercle des Étudiants Anarchistes프랑스어('무정부주의 학생 서클') 회의에서 그를 무정부주의 사상에 익숙한 동조자로 소개했다. 카뮈는 르 리베르테르프랑스어('자유주의자'), 라 레볼루시옹 프로레타리엔la('프롤레타리아 혁명'), 무정부 싱디칼리스트 국가노동총연맹(CNT, '국가노동연맹')의 기관지인 솔리다리다드 오브레라es('노동자 연대')와 같은 무정부주의 출판물에 글을 썼다.

카뮈는 알제리 전쟁(1954~1962) 동안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했다. 그는 국민해방전선(FLN)의 폭력에 반대했지만, 식민지 프랑스가 가한 불의와 잔혹 행위를 인정했다. 그는 피에르 멘데스 프랑스의 통일 사회당(PSU)과 그 위기에 대한 접근 방식을 지지했는데, 멘데스 프랑스는 화해를 옹호했다. 카뮈는 비슷한 생각을 가진 알제리 운동가 아지즈 케수를 지지하기도 했다. 카뮈는 두 당사자 간의 휴전을 협상하기 위해 알제리로 여행했지만 모든 당사자로부터 불신을 받았다. 종종 잘못 인용되는 한 사건에서 카뮈는 1957년 스톡홀름에서의 노벨상 수상 연설 중 알제리 비평가와 맞서며 정의와 혁명적 테러의 거짓된 동등성을 거부했다. "사람들은 지금 알제리의 전차에 폭탄을 설치하고 있습니다. 제 어머니가 그 전차 중 하나에 탈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정의라면, 저는 제 어머니를 더 좋아합니다."[16] 비평가들은 이러한 반응을 반동적이며 식민지주의적 태도의 결과라고 비난했다.

카뮈는 핵무기 확산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1950년대 카뮈는 인권에 힘썼다. 1952년 유엔이 카우딜로인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의 지도 아래 스페인을 회원국으로 받아들이자 유네스코에서 사임했다. 카뮈는 평화주의를 유지했고 전 세계 어디에서든 사형제도에 저항했다. 그는 작가이자 지식인이며 사형 반대 연맹의 설립자인 아서 코이스터와 함께 사형제도에 반대하는 수필 레플렉시옹 쉬르 라 뻬느 까피탈프랑스어('사형에 대한 성찰')을 썼는데, 이는 1957년 칼만-레비에서 출판되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함께 카뮈는 1950년에서 1951년 사이에 제네바 스위스의 팔레 엘렉토랄에서 열린 인민 세계 회의(PWC), 즉 인민 세계 구성 의회(PWCA)의 후원자 중 한 명이었다.[17][18]

카뮈는 사상적 유사성 때문에 종종 실존주의자로 분류되지만, 카뮈 자신은 실존주의와의 관계를 분명히 부정했다。『시지프 신화』에서도 키르케고르, 셰스토프, 야스퍼스 등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이름을 거명하며, 그들의 사상이 부조리에서 출발하면서도 궁극적으로 부조리한 세계에서 도약하여 이성의 부정으로 향하는 “철학적 자살”이라고 비판하고 있다.[32]

카뮈에 따르면, “부조리(absurde)”라는 감정은 단순히 어떤 사물의 감각이나 인상에 대한 검토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계획과 명백한 현실의 비교, 이치에 맞지 않는 결과와 당연히 예상되는 결과의 비교와 같이, “사실로서의 어떤 상태와 어떤 종류의 현실과의 비교로부터, 어떤 행동과 그것을 초월하는 세계와의 비교로부터 분출해 나오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인간 내부에 있는 것도 세계에 있는 것도 아니고 “양자의 공존 속에 있는 것”, “양자를 잇는 유일한 유대”이다.[33] 그리고 카뮈는 자살을 부조리한 운명을 직시하지 않는 태도로 배척하고, 반대로 부조리를 명석한 의식 아래서 계속해서 직시하는 태도를 “반항”이라고 표현하며, 그것이 삶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칭찬하고 있다.[34]

『』에서 카뮈는 이 “반항”에 대한 고찰을 더욱 심화시킨다. “반항”이란, 예를 들어 오랫동안 억압받아 온 노예가 갑자기 주인에게 “아니오(Non)”를 쏘아붙이는 태도이다. 이때 이 “아니오”에는 “이 이상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경계선의 존재가 함축되어 있다. 즉, 경계선 바깥의 것을 “아니오”로 배척하고, 안에 있는 것을 “예(Oui)”로 지키려고 하는 것이며, 달리 말하면 자신 안에 있는 가치에 대한 의식이다.[35] 그리고 부조리의 경험이 개인적인 고뇌로 끝나는 것과는 달리, 타인에 대한 압박을 보는 것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반항은 초개인적인 것이며, 거기서 연대가 생겨난다.[36] 또한 『반항하는 인간』에서는 상당한 분량을 혁명을 중심으로 한 역사 서술에 할애하고 있으며, 거기에서는 “순수에 대한 향수”인 반항에서 일어난 모든 혁명이 필연적으로 자유를 속박하는 공포 정치와 전체주의로 변모해 가는 모습이 고찰된다.

하지만 혁명에 필요한 정치적 폭력을 비판하는 카뮈의 이러한 태도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공산주의자이기도 한) 사르트르와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카뮈=사르트르 논쟁) . 논쟁의 직접적인 계기는 프란시스 잔송이 사르트르의 잡지 『르 탕 모던느(현대)』에 『반항하는 인간』에 대한 비판적 서평을 게재한 것이었고, 이에 대해 카뮈가 사르트르에게 반론을 제기하고, 더 나아가 잔송과 사르트르가 반론을 제기하는 형태로 일어났지만, 여기서 사르트르는 카뮈의 사상을 애매한 태도로 간주하고, 그가 모랄리즘에 빠져 “덕의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37]”고 철저하게 비판하고 있다.

3. 1. 부조리 철학

카뮈는 자신의 에세이에서 행복과 슬픔, 어둠과 빛, 삶과 죽음 같은 이원성에 관하여 독자에게 발표하며, 행복은 무상하고 인간은 필멸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분석한다. 그는 삶과 행복의 가치를 반영하면서 이러한 분석을 병적이지 않게 진행한다. 카뮈에 따르면 부조리는 "인간의 욕구와 세계의 불합리한 침묵 사이의 대립"의 결과이다.

카뮈는 부조리에 관한 우리의 이해에 의미심장한 기여를 하였고 확실한 대답으로서의 허무주의를 거부하였다. 그는 부조리를 깨닫는 것이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야기하지만, 자살은 인간의 가치와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라며 단호하게 거부한다. 대신 그는 부조리가 우리 삶의 일부임을 받아들이고 그것과 함께 살 것을 제안한다.

카뮈의 부조리에 대한 생각은 그의 저서 ''시지프 신화''에서 시작되었다. 1942년에는 부조리한 삶을 사는 한 남자의 이야기인 ''이방인''을 출판했다. 그는 또한 부조리한 논리를 추구하는 로마 황제 칼리굴라에 관한 희곡을 썼다. 그의 초기 생각은 1937년 에세이집 ''사이와 사이(Betwixt and Between)''에 나타났으며, 1938년 ''Noces프랑스어''(''결혼식(Nuptials)'')에서 더욱 세련되게 표현되었다.

1961년 프랑스 화가 루이 베니스트가 티파자에 만든 비석으로, 결혼식(Nuptials)(에세이)에서 발췌한 내용인 "여기서 나는 영광의 개념을 이해합니다. 무한히 사랑할 자유"가 새겨져 있습니다.


카뮈는 사상적 유사성 때문에 종종 실존주의자로 분류되지만, 카뮈 자신은 실존주의와의 관계를 부정했다. 『시지프 신화』에서 키르케고르, 셰스토프, 야스퍼스 등 실존주의 철학자들을 비판하며, 그들의 사상이 부조리에서 출발하면서도 궁극적으로 이성의 부정으로 향하는 “철학적 자살”이라고 비판한다.[32]

카뮈에 따르면, “부조리(absurde)”라는 감정은 “사실로서의 어떤 상태와 어떤 종류의 현실과의 비교로부터, 어떤 행동과 그것을 초월하는 세계와의 비교로부터 분출해 나오는” 것이며, 인간과 세계 양자의 공존 속에 있는 것이다.[33] 그는 자살을 부조리한 운명을 직시하지 않는 태도로 배척하고, 부조리를 명석한 의식 아래서 계속해서 직시하는 태도를 “반항”이라고 표현하며, 그것이 삶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든다고 칭찬하고 있다.[34]

카뮈는 “반항”에 대한 고찰을 『』에서 더욱 심화시킨다. “반항”은 억압받는 노예가 주인에게 “아니오(Non)”를 쏘아붙이는 태도로, 경계선 바깥의 것을 배척하고 안에 있는 가치를 지키려는 것이다.[35] 부조리의 경험이 개인적인 고뇌로 끝나는 것과는 달리, 반항은 초개인적인 것이며, 거기서 연대가 생겨난다.[36]

카뮈는 혁명에 필요한 정치적 폭력을 비판하여 공산주의자였던 사르트르와 논쟁을 벌였다(카뮈=사르트르 논쟁).[37] 사르트르는 카뮈의 사상을 애매한 태도로 간주하고, 그가 모랄리즘에 빠져 “덕의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고 비판했다.[37]

3. 2. 반항과 연대

카뮈는 나치의 파시즘이나 스탈린주의와 같은 전체주의에 맞서 수많은 반대 성명을 발표하고 반대 행동을 실천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프랑스 레지스탕스 저널 《콩바(combat)》의 편집장으로 활동하며 나치 점령자와 프랑스 부역자들을 비판했다.

카뮈는 사르트르와의 결별 역시 전체주의에 대한 반대와 관련이 있다. 카뮈는 사르트르가 옹호하는 대중 정책이 전체주의에 호응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반항하는 인간》에서 카뮈는 소비에트 연방의 가혹한 통치를 비판하고, 1956년 헝가리 혁명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소련군을 강력하게 규탄했다.

카뮈는 억압, 불의, 인간의 조건을 훼손하는 모든 것에 대한 저항의 당위성을 역설했지만, 동시에 반항에는 한계가 있다고 보았다. 《반항하는 인간》에서 그는 ''시지프 신화''에서 제시된 부조리 개념을 바탕으로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제시하며, 공통된 인간 조건에 대한 인식을 강조한다. 또한 혁명과 반항을 구분하고, 혁명이 억압적인 체제로 변질될 수 있음을 지적하며 혁명 수행에 있어 도덕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카뮈는 침묵하는 우주에서 인간이 윤리적이고 의미 있는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는지 질문하며, 부조리에 대한 경험과 인식이 도덕적 가치를 창출하고 행동의 한계를 설정하기 때문에 '예'라고 답한다. 그는 현대적인 형태의 반항을 형이상학적 반항과 역사적 반항으로 구분하고, 반항자가 세상의 악과 반항 자체의 내재적 악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어야 하며 정당화할 수 없는 고통을 초래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카뮈는 사상적 유사성 때문에 실존주의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자신은 실존주의자가 아니라고 명확히 밝혔다. 『시지프 신화』에서 키르케고르, 셰스토프, 야스퍼스 등 실존주의 철학자들을 “철학적 자살”이라고 비판했다.[32] 카뮈는 “부조리”를 명석한 의식 아래서 계속 직시하는 “반항”이 삶을 가치 있게 만든다고 보았다.[34]

반항하는 인간』에서 카뮈는 “반항”을 오랫동안 억압받아 온 노예가 주인에게 “아니오(Non)”를 외치는 태도로 설명한다. 이 “아니오”는 경계선 바깥의 것을 배척하고 안에 있는 가치를 지키려는 의지를 나타낸다.[35] 부조리의 경험이 개인적 고뇌로 끝나는 것과 달리, 반항은 타인에 대한 압박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초개인적인 것이며, 여기서 연대가 생겨난다.[36] 카뮈는 혁명이 필연적으로 공포 정치와 전체주의로 변모해 가는 모습을 고찰한다.

카뮈의 정치적 폭력 비판은 공산주의자였던 사르트르와의 논쟁(카뮈=사르트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사르트르는 카뮈의 사상을 애매한 태도로 간주하고, 모랄리즘에 빠져 “덕의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고 비판했다.[37]

3. 3. 휴머니즘과 실존주의

카뮈는 파시즘이나 스탈린주의와 같은 전체주의에 반대하는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프랑스 레지스탕스 저널 콩바(combat)의 편집장으로 활동하며 나치 점령자와 프랑스 부역자들을 비판했다.

카뮈는 소련의 억압적인 통치를 비판했으며, 1956년 헝가리 혁명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소련군을 강력하게 규탄했다.

카뮈는 부조리주의와 연관되어 있지만, 실존주의자로 분류되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거부했다. 카뮈는 자신의 철학적 기원이 고대 그리스 철학, 니체, 17세기 도덕주의자들에게 있다고 말했다. 그는 시지프 신화에서 실존주의의 여러 측면을 비판했으며, 마르크스와 사르트르가 주장한 역사의 중요성이 인간의 자유에 대한 자신의 믿음과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반면 카뮈는 삶의 부조리함과 죽음의 필연성을 강조하며 실존적 질문에 철학의 중심을 두었다. 그는 삶의 무의미함, 즉 부조리를 인간이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 보았다. 기독교에 대한 반대와 개인적 도덕적 자유와 책임에 대한 그의 헌신은 다른 실존주의 작가들과의 유사점 중 일부이다. 카뮈는 자살을 부조리함에 대한 해결책으로 보았으며, "정말 심각한 철학적 질문은 단 하나뿐이며,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라고 썼다.[19]

카뮈는 자살을 부조리한 운명을 직시하지 않는 태도로 배척하고, 부조리를 명석한 의식 아래서 계속 직시하는 "반항"을 옹호했다.[34] 그는 『반항하는 인간』에서 "반항"을 오랫동안 억압받아 온 노예가 주인에게 "아니오"를 외치는 태도로 설명하며, 이는 경계선 바깥의 것을 배척하고 안에 있는 가치를 지키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35] 카뮈는 타인에 대한 압박을 보는 것에서도 반항이 일어날 수 있으며, 이것이 초개인적인 연대를 낳는다고 보았다.[36]

『반항하는 인간』에서는 혁명을 중심으로 한 역사 서술을 통해, 반항에서 일어난 모든 혁명이 필연적으로 자유를 속박하는 공포 정치전체주의로 변모해 가는 모습을 고찰한다.[36] 혁명에 필요한 정치적 폭력을 비판하는 카뮈의 태도는 카뮈-사르트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37] 사르트르는 카뮈의 사상을 애매한 태도로 간주하고, 그가 모랄리즘에 빠져 "덕의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고 비판했다.[37]

4. 작품 목록

알베르 카뮈의 작품은 다음과 같다.


  • 소설
  • * La Mort heureuse프랑스어 (행복한 죽음) (1936–1938, 사후 출간 1971)
  • * L'Étranger프랑스어 (이방인) (1942)
  • * La Peste프랑스어 (페스트) (1947)
  • * La Chute프랑스어 (전락) (1956)
  • * 단편집 L'exil et le royaume프랑스어 (적지와 왕국) (1957)
  • * Le premier homme프랑스어 (첫 번째 사람) (집필 중 사망하여 미완성 유작이 됨, 1994)

  • 단편집
  • * 알베르 카뮈는 1957년에 단편집 《적지와 왕국》(''L'exil et le royaume'')을 출간했다. 이 단편집에는 "결혼한 여자" (''La Femme adultère''), "배신자" (''Le Renégat ou un esprit confus''), "침묵하는 사람들" (''Les Muets''), "손님" (''L'Hôte''), "요나스, 또는 작업하는 예술가" (''Jonas, ou l'artiste au travail''), "자라는 돌" (''La Pierre qui pousse'')이 포함되어 있다.

  • 논픽션
  • * 알베르 카뮈는 다양한 논픽션 작품을 저술했다.
  • * 1935년에는 학위 논문인 《기독교적 형이상학과 신플라톤 철학》을 발표했다.
  • * 1937년에는 첫 수필집 《안과 겉》을 출간했고, 1938년에는 《결혼》을 발표했다.
  • * 1942년에는 부조리 철학을 담은 에세이 《시지프 신화》를 출간하여 큰 주목을 받았다.
  • * 1951년에는 인간의 반항 정신을 다룬 《반항하는 인간》을 발표했다.
  • * 카뮈는 시사평론집도 여러 권 출간했는데, 1950년 《시사평론1》, 1953년 《시사평론2》, 1958년 《시사평론3》(알제리 연대기)을 발표했다.
  • * 1948년에는 《독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를 공저의 부분으로 출간했다.
  • * 1954년에는 《여름》, 1957년에는 사형 제도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담은 《단두대에 대한 성찰》을 발표했다.
  • * 그 외에도 1965년 사진집 《태양의 후예》, 1958년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을 묶은 《스웨덴 연설》, 그리고 사후에 출간된 《작가수첩》 시리즈(1962, 1965, 1989)와 《여행일기》(1978) 등이 있다.

  • 희곡
  • * 알베르 카뮈는 여러 편의 희곡을 집필 및 번안했다.
  • * 1936년에는 친구 3명과 공동으로 《아스튀리의 반란》을 썼다.
  • * 1938년에는 《칼리굴라》를 집필했으며, 1944년에는 《오해》를 발표했다.
  • * 1948년에는 《계엄령》, 1949년에는 《정의의 사람들》을 발표했다.
  • * 1953년에는 페드로 칼데론 데라바르카의 원작을 번안한 《십자가에의 예배》와 피에르 드 라리베의 원작을 번안한 《정령》을 발표했다.
  • * 1955년에는 디노 부차티의 원작을 번안한 《흥미있는 경우》, 1956년에는 윌리엄 포크너 원작을 번안한 《한 수녀를 위한 진혼곡》을 발표했다.
  • * 1957년에는 로페 데 베가의 원작을 번안한 《올메도의 기사》, 1959년에는 도스토옙스키 원작을 번안한 《악령》을 발표했다.

4. 1. 소설


  • La Mort heureuse프랑스어 (행복한 죽음) (1936–1938, 사후 출간 1971)
  • L'Étranger프랑스어 (이방인) (1942)
  • La Peste프랑스어 (페스트) (1947)
  • La Chute프랑스어 (전락) (1956)
  • 단편집 L'exil et le royaume프랑스어 (적지와 왕국) (1957)
  • Le premier homme프랑스어 (첫 번째 사람) (집필 중 사망하여 미완성 유작이 됨, 1994)

4. 2. 단편집

알베르 카뮈는 1957년에 단편집 《적지와 왕국》(''L'exil et le royaume'')을 출간했다. 이 단편집에는 "결혼한 여자" (''La Femme adultère''), "배신자" (''Le Renégat ou un esprit confus''), "침묵하는 사람들" (''Les Muets''), "손님" (''L'Hôte''), "요나스, 또는 작업하는 예술가" (''Jonas, ou l'artiste au travail''), "자라는 돌" (''La Pierre qui pousse'')이 포함되어 있다.

4. 3. 논픽션

알베르 카뮈는 다양한 논픽션 작품을 저술했다. 1935년에는 학위 논문인 《기독교적 형이상학과 신플라톤 철학》을 발표했다. 1937년에는 첫 수필집 《안과 겉》을 출간했고, 1938년에는 《결혼》을 발표했다. 1942년에는 부조리 철학을 담은 에세이 《시지프 신화》를 출간하여 큰 주목을 받았다. 1951년에는 인간의 반항 정신을 다룬 《반항하는 인간》을 발표했다.

카뮈는 시사평론집도 여러 권 출간했는데, 1950년 《시사평론1》, 1953년 《시사평론2》, 1958년 《시사평론3》(알제리 연대기)을 발표했다. 1948년에는 《독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를 공저의 부분으로 출간했다. 1954년에는 《여름》, 1957년에는 사형 제도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담은 《단두대에 대한 성찰》을 발표했다.

그 외에도 1965년 사진집 《태양의 후예》, 1958년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을 묶은 《스웨덴 연설》, 그리고 사후에 출간된 《작가수첩》 시리즈(1962, 1965, 1989)와 《여행일기》(1978) 등이 있다.

4. 4. 희곡

알베르 카뮈는 여러 편의 희곡을 집필 및 번안했다. 1936년에는 친구 3명과 공동으로 《아스튀리의 반란》을 썼다. 1938년에는 《칼리굴라》를 집필했으며, 1944년에는 《오해》를 발표했다. 1948년에는 《계엄령》, 1949년에는 《정의의 사람들》을 발표했다.

1953년에는 페드로 칼데론 데라바르카의 원작을 번안한 《십자가에의 예배》와 피에르 드 라리베의 원작을 번안한 《정령》을 발표했다. 1955년에는 디노 부차티의 원작을 번안한 《흥미있는 경우》, 1956년에는 윌리엄 포크너 원작을 번안한 《한 수녀를 위한 진혼곡》을 발표했다. 1957년에는 로페 데 베가의 원작을 번안한 《올메도의 기사》, 1959년에는 도스토옙스키 원작을 번안한 《악령》을 발표했다.

5.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

카뮈의 소설과 철학 에세이는 여전히 영향력이 크다. 그의 사후, 카뮈에 대한 관심은 새로운 좌파(New Left)의 부상과 쇠퇴를 따라갔다. 소련 붕괴 이후, 공산주의에 대한 그의 대안적인 길에 대한 관심이 다시 나타났다. 그는 회의적인 휴머니즘과 정치적 관용, 대화, 시민권에 대한 그의 지지로 기억된다.

카뮈는 소련 반대 공산주의, 심지어 아나코-신디칼리즘까지 연결되어 왔지만, 일부 신자유주의자들은 그를 자신들의 정책과 연결하려고 시도했다. 예를 들어, 프랑스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는 그의 유해를 팡테옹(Panthéon)으로 옮길 것을 제안했는데, 이는 카뮈의 유족들의 비판을 받았고 좌파의 많은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스페인 갈리시아(Galicia) 라 코루냐(La Coruña)의 알베르 카뮈 거리.


미국의 헤비메탈 밴드 어벤지드 세븐폴드(Avenged Sevenfold)는 그들의 앨범 ''Life Is But a Dream...''이 카뮈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혔다.[20]

알베르 카뮈는 또한 고전 애니메이션과 만화 세인트 세이야(Saint Seiya)에서 물병자리 황금 성투사 카뮈의 영감이 되었다.[21]

참조

[1] 서적 Poststructuralism and Critical Theory's Second Generation Acumen
[2] 웹사이트 Camus http://www.dictionar[...]
[3] 웹사이트 A Democratic World Parliament https://www.democrac[...] 2024-01-12
[4] 웹사이트 Albert Camus Wins the Nobel Prize & Sends a Letter of Gratitude to His Elementary School Teacher (1957) https://www.opencult[...] 2024-01-07
[5] 웹사이트 I embrace you with all my heart – Letters of Note https://lettersofnot[...] 2024-01-07
[6] 웹사이트 Lettre de Monsieur Germain à Albert Camus https://compagnieaff[...] 2024-01-09
[7] 서적 Camus's thesis was titled "Rapports de l'hellénisme et du christianisme à travers les oeuvres de Plotin et de saint Augustin" ('Relationship of Greek and Christian Thought in Plotinus and St. Augustine') for his diplôme d'études supérieures (roughly equivalent to an MA thesis).
[8] 서적 Dictionnaire Albert Camus Groupe Robert Laffont
[9] 학술지 Transcendent Rebellion: The Influence of Simone Weil on Albert Camus' Esthetics https://doi.org/10.1[...] 2022-01-02
[10] 학술지 A Political Theology of the Absurd? Albert Camus and Simone Weil on Social Transformation https://academic.oup[...] 2006-09
[11] 학술지 Albert Camus, Simone Weil and the Absurd https://www.academia[...]
[12] 서적 Simone Weil: An Introduction to Her Thought Wilfrid Laurier University Press
[13] 잡지 Without God or Reason https://www.commonwe[...] 2021-01-01
[14] 웹사이트 Liberty's Claims on Man and Citizen in the Life and Writings of Albert Camus https://theihs.org/a[...] 2022
[15] 웹사이트 Albert Camus https://iep.utm.edu/[...]
[16] 웹사이트 Resistance, Rebellion, and Writing https://www.bookforu[...] 2013-04
[17] 서적 Einstein on peace http://archive.org/d[...] New York, Schocken Books
[18] 웹사이트 [Carta] 1950 oct. 12, Genève, [Suiza] [a] Gabriela Mistral, Santiago, Chile [manuscrito] Gerry Kraus. http://www.bibliotec[...] 2023-10-19
[19] 서적 L'Homme revolté Gallimard 1951
[20] 웹사이트 AVENGED SEVENFOLD Announces 'Life Is But a Dream...' Album, Shares 'Nobody' Music Video https://blabbermouth[...] 2023-03-14
[21] 웹사이트 Aquarius Camus: 5 Facts+ All you Need to Know https://cavzod.net/a[...] 2023-10-19
[22] 웹사이트 Au sujet de la stèle de Camus dans les ruines de Tipaza https://tipaza.typep[...]
[23] 웹사이트 La Poste https://www.laposte.[...]
[24] 웹사이트 NHK 100分 de 名著「カミュ「ペスト」」 https://www.nhk.or.j[...]
[25] 웹사이트 Albert Camus (1913-1960) archive, sur france.fr http://archive.wikiw[...] 2013-11-28
[26] 웹사이트 NHK高校講座 世界史 第24回 アメリカ合衆国の独立とフランス革命 https://www.nhk.or.j[...]
[27] 문서 井上 2000
[28] 웹사이트 The Nobel Prize in Literature 1957 https://www.nobelpri[...] Nobelprize.org
[29] 서적 アルベール・カミュ
[30] 웹사이트 Accident Albert Camus http://www.ina.fr/vi[...]
[31] 뉴스 Mort d'Albert Camus: le KGB impliqué ? https://www.lefigaro[...] 2011-08-08
[32] 문서 カミュ 2006
[33] 문서 カミュ 2006
[34] 문서 カミュ 2006
[35] 문서 カミュ 1973
[36] 서적 カミュ 1973
[37] 서적 カミュ・サルトル 2006
[38] 문서 리세(lycée): 고등학교, 일부학교에서는 그랑제콜 준비과정인 대학교 1, 2학년에 해당하는 수업도 운영
[39] 백과사전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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